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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한정애입니다/걸어온길

by 한정애 2012. 7. 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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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고수동굴이 멀지 않은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함경남도 장진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남하하신 아버님의 형제분들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생활 터전을 일구었습니다. 아버님은 단양에서 광산업에 종사 하시다가 1972년 겨울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남겨진 어머님은 아무런 대책이 없어 다섯 아이를 데리고 친정 동생이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하시게 됩니다. 그 시대의 어머님들이 다 그러하셨듯이 억척스럽게 다섯 아이를 기르셨고, 우리는 그러한 어머님의 무한한 사랑과 희생을 자양분으로 잘 성장했습니다.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학창시절, 별로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어버이날을 즈음한 글짓기 시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적어 반 전체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기억과 초등학교 때 해 본 철 이른 반항 정도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던 특별활동 시간에 몰래 혼자 빠져나와 학교 뒷동산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주임선생님께 들켜 혼이 난 후, 다음날부터 등교를 거부하고 동네 뒷산에 올라 시를 쓴다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며칠 후, 끝내 어머님 손에 이끌려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는 했습니다만 어쨌든 그 사건 이후 저는 책벌레가 되었고, 책을 끼고 살았습니다. 무작정 활자를 읽기 시작하였고, 잠자라며 야단치시는 어머니를 피해 장롱 속에 들어가 몰래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선 쉬는 시간 10분을 이용해 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읽고 또 읽고,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신장염이 발병합니다. 학교를 휴학했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생활이었지만 큰 차도가 보이지 않아 결국 서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에서도 이렇다 할 의료적 소견을 내지 못해 의료진으로부터 생을 포기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만 듣고 퇴원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저를 이렇게 살려 놓으신 것은 어머님의 정성이었습니다.

 

기적이었을까요! 어머님의 가없는 자식 사랑에 저는 차츰 회복을 하게 되어 2년간의 휴학을 끝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했고, 대학에 진학을 했습니다.

 

 

 

직장 그리고 유학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채를 통해 한국산업안전공단에 취직을 했습니다. 제가 사회에 눈을 뜬 것은 아마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제 임무는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게는 매우 감사한 그리고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것만 같았던 제 임무가 제 가슴 속에 큰 파동을 일으킨 것은 1991년 어느 뜨겁던 여름날로 기억이 됩니다. 부산시 남구 문현동에 위치한 한 목재가공공장에 기술지원을 나갔습니다. 그 공장은 따로 사무실이랄 것도 없는, 그저 공장 한쪽에 공장장 책상을 두고 있는 그야말로 너무나 열악하기 그지없는 그런 작업 공간이었습니다. 개선요망 사항을 확인한 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제게 공장장께서는 낡은 책상 서랍을 열더니 흰 봉투 하나를 꺼내 제게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무실 하나 변변하게 가지지 못할 정도로 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시는 이 분들이 점검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저 같은 이들에게 봉투를 내밀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무척이나 고민스러웠습니다.

 

저는 그 공장장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공장장님 저 이 봉투 받았습니다.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주신 셈 치고 현장에 계신 분들에게 시원한 음료수나 수박이라도 사주십시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 공단 생활은 제게 있어 그냥 직장이 아니었습니다. 부산과 창원, 그리고 울산에서 근무하며 현장의 작업환경을 개선해보고자 정말 많이 노력을 했고, 아주 즐겁게 그 사명을 수행해나갔습니다.

 

 

97년 기술사자격을 취득하고도 현장 노동자들을 위한 기술지원에 부족함을 느낀 저는 더 많은 지식을 채우기 위해 유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좀 더 지식을 쌓고 배워서 그것을 다시 우리의 현장에 전달하고픈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정부 장학생으로 선발이 되어 출국을 준비하려는 찰나, IMF 위기가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정부의 강제적인 구조조정이 우리 공단에도 불어 닥쳤고, 제 유학 건은 공단에서 불허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장학금과 유학 둘 다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9년 여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 직장에는 휴직계를 내고 영국 노팅험대학(University of Nottingham)으로 자비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6·15 남북 정상회담 소식을 접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등장에 환호했습니다. 2003년 8월말, 박사논문 심사를 모두 마치고 귀국하여 다시 공단으로 복직 하였습니다.

 

 

노동조합, 한국노총, 그리고 통합

 

한국을 떠나 있던 그 기간 동안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한 것 같은데, 제가 속해 있는 조직은 마치 그 변화에서 비껴 나 있는 듯 했습니다. 그 조직문화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2005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노조위원장 선거에 뛰어들었고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의 수석부위원장으로 당선되어 공공기관 지방이전 관련 협상을 비롯하여 국민연금기금운영위원회와 건강보험재정운영위원회 등의 위원으로서 노동자 측을 대변하는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노사정위원회에서는 제 전문분야인 산재보험관련 발전위원회 및 일·가정양립과 여성고용촉진위원회를 통해 사회적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방안을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2011년 저는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외협력 업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정치와 연대 그리고 통일 사업이 그것입니다.

 

역시, 언제나 정치가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2007년 대선을 즈음하여 맺은 보수정권과의 정책연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노총 내에는 여전히 높디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걸 넘어야 할 숙제가 제게 주어진 것입니다.

 

2011년 4.27 재보선 정치방침의 수립을 노총의 정치적 행보를 바꾸는 분수령으로 삼았습니다. 정책연대파기와 노조법 개악의 책임을 물어 한나라당을 심판의 대상으로 천명 하였습니다. 명분과 의지를 가지고 결의기구에 상정하여 밀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한, 어찌 보면 가녀린 몸부림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을 바꾸어내는 마중물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4월 한 달을 분당과 강원 그리고 김해를 파고들며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한국노총에도 작은 변화들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 내에서도 노총에 대한 변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당이 4.27 보궐선거를 함께 치러 내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상시적인 소통체계가 만들어지고 이명박정부의 그릇된 정책을 바로 잡기 위한 공동의 전선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2011년 용광로 같던 여름을 지나며, 2012년에 있을 총·대선 과정에서의 노총 행보를 결정짓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현장 조합원과 노조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의식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현장의 조합원들은 정권교체와 야권통합에 큰 기대를 하고 있음이 나타났습니다.

 

노총 내 일부의 노골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권통합을 위한 연석회의에 참여 방침을 결의기구를 통해 이끌어냈으며, 저는 연석회의 산하 통합추진소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통합 관련 기본방향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2011년 12월 8일 마침내 통합정당 참여를 결의하기 위한 한국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임시대의원대회에 참석한 모든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야권 통합 정당에의 참여와 지지를 결의해 주었습니다. 노총의 역사에 살아있는 권력에 편승하지 않은 첫 결정이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저는 민주당·시민통합당·한국노총을 주축으로 하는 통합수임기구 수임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주통합당의 창당 기초 작업을 함께 하였습니다. 제19대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비상대책위원, 제1기 원내부대표, 국회운영위원, 예산결산위원, 그리고 당대변인이라는 중책을 맡아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2016년 봄, 새롭게 신설된 강서구 병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대에 이어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2016년 가을,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촛불은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것은 우리사회를 공정과 정의로 다시 써내려가라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기도 하였습니다.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저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문재인 후보에 대한 민주당의 홍보본부장 직을 수행하며 대선을 치루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당시 홍보 채널 중 하나인 '문재인 1번가'를 기억해주고 계십니다. 뿌듯한 기억입니다. 또한 인수위도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 임기 5년간의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참여하여 사회분야 정책에 대한 밑그림을 함께 그렸습니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폭풍속에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아 국민의 안전과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2020년 코로나 19가 창궐하는 가운데 벌어진 의료계파업에 있어서는 혈혈단신 대화와 소통을 통해 의협과 협상을 이끌어내어 파업을 철회시키고 의사들이 환자 곁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2021년 제 19대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2050 탄소중립을 향한 대한민국의 비전과 목표를 명확히하고 묵은 과제라 할 수 있는 낙동강 먹는물 문제, 사육곰 종식 등에 대한 기본 방향을 수립하였고,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 플라스틱 재활용, 수자원이용 정책 등 대한민국 산업정책의 녹색으로의 대전환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이 일상이 될 수 있는 사회, 원칙과 상식이 특권과 반칙을 몰아내고 사람사는 세상이 되는 아름다운 꿈.

그리고 이제 그 꿈의 실현을 위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역사의 진보를 믿고, 노동이 존중받는 평등복지국가를 향한 대 장정에 힘차게 떨쳐 일어서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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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13) 201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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